첫 번째 리뷰는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 작년 12월 감상 한 이래 두 번째로 감상하는 것이다. 친구가 관심이 있다고 해서 같이 보게 되었다.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이번에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처음 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였다. 곧바로 말하자면 신님의 정체라던지, 눈치채지 못했던 모 캐릭터의 파격적인 의상같은 것이.
이 작품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인간의 존재와 인식, 네트워크 속에서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주인공이 현실과 가상의 자아가 부딪히면서 흔들리는 모습은 우리 세대가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서 경험하는 혼란과 방황과도 닮아 있다. "기억이란 그저 기록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기억과 정체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나를 증명하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이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지···. 레인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는 듯이 묘사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중인격이다. 네트워크 속에서의 레인과 현실 세계에서의 인격이 다르고, 후반으로 갈수록 이 벽이 무너지고 뒤섞이는 듯 보이지만 결코 합쳐지지는 않는다. 허나 전부 '이와쿠라 레인'이다.
주인공 이와쿠라 레인이 여러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록 현실 세계에서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결과적으로 레인은 모두에게 잊혀지는 선택을 하게 된다. 레인의 말로는 인간의 정체성이 단순히 신체적 존재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격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작품의 철학은 현실 세계의 소셜 네트워크와도 일맥상통하다.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시기인 1998년도에 나온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통찰력이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인간의 사회와 의식에 어떤 방식으로 자리잡을지 예측한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비전을 보여준다. 작품 속 와이어드(Wired)는 메타버스와도 닮아있다. 실제로 2024년도의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은 대표적인 메타버스 플랫폼 VRchat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해 온라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연말까지 쭉 진행되는 것 같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한 번씩 가보기를 추천*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 "잊혀짐"이란 키워드에는 늘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갖는 애정이 큰 것 같다. 떠난 사람과 그 후에 남겨진 사람들. 이런 이야기는 참으로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그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는다면 어떨까. 결국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되는 걸까? 기억이란 그저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다. 그렇기에 인터넷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연결망에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 세대의 현대인은 대부분이 하루를 열며 네트워크에 접속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연결을 지속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전봇대, 거미줄과도 같이 전선으로 뒤덮인 하늘. 귀가 먹먹해지는 꾸준한 노이즈와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의 아스팔트 도로. <시리얼 익스페리먼츠 레인>은 감각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인간성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적인 작품으로, 21세기를 펼쳐냈다.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통찰력과 현대 사회의 차가운 폭력성, 사람과 사람을 잇는 선뜩한 연결을 빈틈없이 담아낸 불후의 명작. 언제까지고 좋아할 것만 같다.